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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자

아이작 뉴턴

글: 수학사전 2023. 1. 12.

Isaac Newton(1643~1727)

따로 설명이 필요 없는 수학자이자 과학자이다. 오늘날 아이폰으로 전 세계를 주름잡는 '애플'사도 어쩌면 뉴턴의 사과에서 비롯된 이름이 아닐까 싶다.

아이작 뉴턴의 생애는 뚜렷하게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는 1643년부터 1669년 의장이 될 때까지의 소년 시절이다. 두 번째는 1669년부터 1687년까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루카스주의 교수로 있던 매우 생산적인 기간이다. 세 번째 기간은 런던에서 수학적 연구에 거의 관심이 없는 공무원으로 보낸 기간이다.

뉴턴은 타고난 천재는 아니었나 보다. 태어나기 세 달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이름도 쓰지 못했다. 어머니는 뉴턴이 2살 때 재혼해서 할머니 슬하에서 컸는데 거의 고아와 다름없었다고 한다. 1653년 의붓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엔 어머니, 할머니, 배다른 남동생 하나, 여동생 둘과 함께 살았다. 이때 문법학교에 다녔는데 학교 보고서는 그를 '게으름'과 '부주의'로 묘사하였고 결국 학교를 그만두었다. 1660년이 되어서야 학교에 돌아갈 수 있었다.

1661년 6월 5일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대학에 입학하였다. 어머니가 부유한 편이었지만 그는 다른 학생들의 시중을 들면서 학자금을 받는 시자르로 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았나?

뉴턴의 목표는 법학 학위였다. 케임브리지에서의 교육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주가 되었지만 3년 차에는 약간의 학습의 자유가 허용되었다. 뉴턴은 데카르트, 홉스, 보일의 철학을 연구했다. 갈릴레오의 천문학에 이끌려 케플러의 광학도 공부했다. 그는 '몇 가지 철학적 질문(Quaestiones Quaedam Philosophicae)'라는 제목으로 자기 생각을 기록했다.

" 플라톤은 내 친구이고 아리스토텔레스도 내 친구지만 가장 친한 친구는 진실이다." 라는 라틴어 문장으로 머리글을 적었다.

'드 무아브르'에 따르면, 뉴턴의 수학에 대한 관심은 1663년 가을 케임브리지의 박람회에서 점성술 책을 구입하고 그 책에 나오는 수학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삼각법 책을 읽으려다가 기하학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배로(Barrow)를 읽기로 결심한다. 유클리드의 원론은 처음 몇 개의 결과가 너무 쉬워서 거의 포기할 뻔했지만 그는 아래를 읽고 마음이 바뀌었다.

같은 밑변을 가지고 같은 평행선 사이에 있는 평행사변형은 같다.

아마도 1권 명제 35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 이 명제에 꽂혔는지는 몰라도 그는 처음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존경심을 품고 유클리드 원론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뉴턴은 월리스의 대수학을 연구했으며 그의 첫 번째 독창적인 수학 작업은 이 텍스트에 대한 연구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는 불가분 양을 사용하여 포물선과 쌍곡선과 같은 넓이의 제곱을 찾는 월리스(Wallis)의 방법을 읽었다. 뉴턴은 급수에 대한 월리스의 처리에 대해 메모를 작성했지만 다음과 같이 정리에 대한 자신의 증명을 고안했다.

월리스는 그렇게 하지만 다음과 같이 할 수도 있습니다.

그는 성과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는 몇 가지 증거에도 불구하고 1664년 4월 28 일에 학자로 선출되고 1665년 4월에 학사 학위를 받는다. 이때까지 과학적 천재성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 1665년 여름 전염병으로 대학을 문을 닫아 링컨셔로 돌아가야 했을 때 갑자기 나타났다. 뉴턴이 아직 25 세 미만일 때 그곳에서 2년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그는 수학, 광학, 물리학 및 천문학에서 혁명적인 발전을 시작했다.


$$F=\frac{Gm_1 m_2}{r^2}$$

$$v=\dot{x},\quad a=\ddot{x}$$

말 그대로 포텐이 터진 뉴턴은 엄청난 성과를 이룬다. 그리고 부와 명예를 모두 가지게 된다. 공부를 잘해서 작위를 받은 최초의 사람이 아닐까? 전 세계 수많은 나라가 뉴턴의 얼굴이 들어간 우표를 발행했다. 그 가운데 대한민국은 없지만 조선은 있다. 

 

미적분의 발견을 두고 벌어진 라이프니츠와 다툼을 생각하면 굉장히 자존심이 강해서 오만하지 않았을까 여겨지는데 그가 남긴 말을 보면 생각보다 겸손한 사람으로 보인다.

내가 더 멀리 볼 수 있었다면 그것은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세상에 어떻게 보이는지 모르지만, 나 자신에게는 해변에서 노는 소년과 같았고, 더 매끄러운 조약돌이나 더 예쁜 조개껍질을 찾는 반면, 진실은 내 앞에 모두 밝혀지지 않은 채 놓여 있었다.

신은 만물을 숫자와 무게와 척도로 창조했습니다.

모든 자연을 설명하는 것은 어느 한 사람에게나 심지어 한 시대에나 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보다 조금은 확실하게 하고 나머지는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맡기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그의 묘비명] Who, by vigor of mind almost divine, the motions and figures of the planets, the paths of comets, and the tides of the seas first demonstrated.

거의 신성에 가까운 마음의 활력으로 행성의 움직임과 모양, 혜성의 경로, 바다의 조수를 처음으로 우리에게 보여준 사람.

사진 출처

 

Newton album page

 

mathshistory.st-andrews.ac.uk